영화 소개
감독: 이준익
국가: 대한민국
장르: 사극, 드라마
출연진: 송강호, 유아인 外
제작사: (주) 타이거 픽쳐스
배급사: (주) 쇼박스
개봉일: 2015년 9월 16일
상영시간: 125분 (2시간 5분)
상영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총 관객 수: 6,247,651 명
평점: 8.49
2015년 9월 16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 2014년 7월에 촬영을 개시했고, 2015년 8월 11일 제작보고회를 개최했다. 배경은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는 임오화변이다. 사도세자의 사후를 그린 에필로그 부문을 제외하면 사건들을 병렬적 시간 구도로 보여준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8일 동안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면서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와 관계가 틀어지고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의 상황을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영화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임오화변은 너무나 익숙한 소재이기 때문에 사도가 뒤주에 갇히는 장면을 앞부분에 배치하고, 왜 사도가 뒤주에 갇혔고 부자 사이가 틀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에 집중하려고 한 영화다. 이준익 감독 말에 의하면, 충혈된 감정으로 시작되는 영화. 영화 자체가 장기간의 역사를 매우 압축해서 보여주므로, 보기 전에 숙종, 경종, 영조, 정조에 대해 대략적으로라도 아는 것이 좋다. 2000년대에 제작된 영화 및 드라마 중 2015년 8월 7일에 방영한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과 함께 노론 음모론을 전면 배제한 작품이다. 그런데 인터넷의 영화 관련 댓글에는 노론 음모론을 앞세운 자칭 전문가들의 글이 잠시 폭주한 적 있고 이후에도 간간이 활동세력이 눈에 띈다.
시놉시스
“잘하자.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 세자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어긋나는 세자에게 실망하게 된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어린 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된 아들. 아버지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된다.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잇지 못한 운명,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가 시작된다.
등장인물
“영조 (송강호)” 아들인 사도세자가 성군이 되기를 바랐던 군주. 극중 영조는 세자가 어린 시절 때부터 엄하게 교육을 시킨다. 영조는 권력 투쟁 와중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으로, 신하들에게 책잡히지 않도록 항상 공부를 강조하고, 즉위할 때 신하들과 약속으로 묵인하고 있던 일부 폐단을 세자가 바꾸려 들자 그걸 왜 멋대로 바꾸냐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툭하면 반역 모의가 나오고, 역모죄로 잡힌 죄인들은 대놓고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한 범인이라고 우기는가 하면 천한 무수리 최씨의 자식이 어떻게 왕이 되냐며 비난한다. 그 말에 영조는 저놈들의 입을 찢어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며 자리를 떠난다. 세제 시절의 혹독한 고생을 견딘 아버지 입장에서는, 항상 자식은 모자란 듯 보인다. 세자가 어린 시절 영조가 직접 쓴 책을 읊으면서 무려 한 구절이나 빼먹자, "놀이는 한때의 맛이요. 학문은 평생의 맛이라고 내가 몇번을 말했느냐! " "저, 저... 눈 껌뻑껌뻑 쳐다보는..." 이라 말하고 노는 것만 좋아한다며 강하게 훈계를 할 정도다.
세자가 어느덧 청년이 되자, 틈만 나면 "양위하겠다."라는 등의 얘기를 꺼낸다. 이는 진짜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세자의 반응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한 테스트였다. 그러다 대리청정이 시작되었는데, 세자의 개혁적인 성향이 자신과 안 맞았고, 거기에 자신이 이뤄놓은 탕평책을 건드리는 게 싫었는지 신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지적을 해서 기를 죽인다. 궐내에서 일어나던 어른의 사정이 사도세자를 망친 격. 대왕대비가 죽은 뒤 부자관계는 더욱 더 어긋나고, 눈 밖에 난 세자를 폐하라는 문서를 쓰라며 세자의 스승들을 압박하고 세자가 저렇게 된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던 와중 영조의 마음을 읽은 김상로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이 나경언을 사주해 부추기고, 영조는 이를 구실로 사도세자에게 칼자루를 내던지면서 "자결하라."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이에 세자도 이런 법도가 어디 있느냐며 언제부터 날 아들로 여겼냐고 거부한다. 당연히 신하들도 이 참상을 보다못해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말리지만, 영조는 그런 신하들마저 모두 내쫒고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직접 못질까지 한다. 영조가 뒤주에 가두기 전에 자살을 종용한 것은 실제 역사상의 사건 그대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시점에서는 자결하는 게 세자로서는 가장 편한 길이긴 했다. 영화 상에서나 역사적으로나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영조 입장에서는 합당한 후계자가 사도세자의 아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좋건 싫건 세손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족보를 뒤져 먼 친척에게 물려줘야 하니까. 그런데 사도세자를 폐서인시키면 세손에게 물려줄 수가 없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세자인 상태에서 죽은 상태"여야 했다. 또한 작중에도 나오지만 사약을 주거나 참형을 하면 역적이 되기 때문에 세손 뿐 아니라 자신의 정통성에도 타격을 준다. 당연히 이 정도로 왕을 끌어내릴 순 없겠지만 큰 타격이 있을 것. 즉, 영조가 이미 정신병자가 되어버린 사도세자에게 보위를 물려주지 않으려면 반드시 "처형이 아닌 형태로 사도세자가 세자의 신분을 유지 (혹은 회복)한 상태에서 사망"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인데, 새파랗게 젊은 세자가 자연사하길 기대할 수도 없으니 자결을 종용한 것이다. 그가 자결했다면 세자로서 사망하고 자연스럽게 세손이 후계로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결을 거부하자 저런 방법으로 죽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정황상 세자와 신하들이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냐"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큰데 (실제 역사에서도 초반엔 몰래 음식과 물도 줬다) 영조 입장에선 아들을 반드시 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반드시 자살하거나 뒤주에서 죽어야지. (이미 국정을 돌보는 것이 불가능해진) 그에게 보위를 주지 않고 손자에게 보위를 주는 것이 둘 다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을 거부한 이상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반드시 죽는게 필요했던 것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후 7일 째 밤에 사경을 헤매는 사도세자와 진심어린 속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로서 그동안 품었던 모든 사심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세자를 엄하게 키울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군주와 후계자로서의 법도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세자를 보면서 얻은 실망이 사랑을 미움으로 변하게 하였다며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과 말 한 마디였다는 세자의 진심을 듣고 왜 우리는 이승과 저승이 갈리는, 최후의 갈림길에서야 서로의 진심을 알았냐면서 한탄한다.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단 말이냐..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그래야 니 아들이 산다."
그 후 세자가 뒤주에서 숨을 거두자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숨과 맥박을 짚어본 뒤 얼굴을 어루만지며 소리 죽여 오열하면서도 명분상 폐서인된 역적을 처단한 것이기에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울린다.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일조했던 김상로를 비롯한 다른 대신들마저 "독하구먼. 자식 죽이고 개선가라......"라고 말하며 씁쓸해 한다. 이렇게 아버지의 심정과 군주의 의무를 복합적으로 드러내었다. 한편 뒤주를 동원해가면서 세자를 죽인 이유는 정순왕후의 가족과 김상로의 대화로부터 나온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사약을 내리면 되지 않냐고 묻자 정순왕후와 김귀주의 아버지인 김한구와 김상로가 사약을 내리거나 참수하는 것은 역적에게 내리는 것이고, 그 3대는 역적으로 취급받으니 아비인 영조 자신도 역적이 되기 때문에, '미쳐서' 아비에게 해를 끼치려한 아들을 왕이 아닌 분노로 '미친' 아비가 죽임으로서 이를 어디까지나 가정문제로 한정지어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자가 역적이 되면 자기는 물론 세손까지 역적이 되기에 세손을 아끼던 영조로서는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게 된 것.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영조는 못난 아버지다. 어릴때 쏟은 사랑이 성인이 되기까지 유지되었다면 좋았을 운명을 자신과 나라만을 생각하면서 별 시덥잖은 이유로 아들을 책망하고, 끝내 아들을 죽이는 게 운명이라면서 단호하게 나오는 모습이 화를 일으킨다. 마지막에 사도세자를 걱정하면서 그래왔다는 이야기나 의리를 내세우며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을 지우는 모습이 참으로 비탄스럽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처단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변호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 때 피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이 얼마나 엄청난 자리인지를 각인시키는 발언을 한다.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영화상의 묘사로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역사적으로는 불명) 영조는 왕으로서 책임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군주로서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줄타기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간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박적으로까지 공부를 했고, 경연에서도 신하들의 말문을 막을 정도의 학식을 가졌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영화에서도 언급이 된다.
그러나 이처럼 공부에 힘을 써야 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공부에 싫증을 느끼고 취미생활에 빠지자 조바심에 계속해서 그를 가혹하게 훈계를 하였고, 아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삐딱하게 나가자 실망감에 점점 차갑고 잔인하게 변한 것이다. 어쩌면 공부 스트레스로 자식을 자살하게까지 만드는 현대의 일부 잘못된 부모와도 비슷하다.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잘못된 교육방식으로 자식을 엇나가게 만든 것. "내가 임금이 아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거다"란 것이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할 수 있는게, 실제로 그가 왕이고 아들이 미래의 왕이란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적어도 아들을 분명히 사랑하는 영화상으론) 저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아들을 몰아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극중 영조가 아들을 사랑했음은 세자가 죽고 시호를 내려주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OST에서도 엿볼수있는데, OST의 제목이 "너를 생각하며 슬퍼하노라"이다. 즉 단순히 과오를 뉘우쳤다며 시법에 맞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실제 역사의 영조와는 달리, 극중 영조는 정말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思) 슬퍼하는 의미로(悼) 시호를 내렸다고 볼수있다.
14년 뒤, 죽기 전에 청년이 된 세손과 함께 임오화변 당시의 기록들을 세초하는 것을 바라보며 너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기록을 지운다고 밝힌 후 세손에게 네 아비를 왕으로 추숭하겠다는 자는 종사의 역적이라며 신신당부한다.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인 것이 큰 충격이었는지 세손과의 대화 중에 애통은 애통이고, 의리는 의리다라며 눈물을 흘린다. 삭제된 장면에서는 숙종을 모시는 빈소에 찾아가 "아버지, 자식 하나 건사하지 못한 이 불초소생을 용서하소서."하고 슬퍼하는 모습이 나온다 실록에서 자식의 죽음에 슬퍼했다는 언급은 없지만 여기서는 아버지의 정을 표현 못했던 것과 아들을 죽인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듯하다. 영화에선 그래도 아들을 사랑하긴 한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제 역사는 어땠는지 알 도리가 없다. 어쨌든 영조도 한 인간이니 자식이 죽었는데 마음이 좋았을까 싶지만 일단 사료로는 증거가 전혀 없다. 실제 역사에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후 복권시킨 것은 후회 따위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세손의 정통성을 위해 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죽자마자 바로 복위시킨 것이다.
게다가 정작 복권된 사도세자를 남들이 다 꺼리는 흉지에다 매장했다. 이를 볼 때 애초에 아들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아 못마땅하게 여기던 중, 사도세자의 만행을 보고 자식이고 뭐고 인간적으로 혐오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애초에 툭하면 사람을 죽여대고 기행을 일삼았으니 부모 이전에 인간으로서 좋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세자를 미치광이로 만든건 100퍼센트 영조 탓이다. 역사에서 후계자에게 엄격한 자질을 요구하거나 자식과 사이가 나쁜 왕이 없진 않았으나 이 정도로 자식을 막 대한 왕은 몇 없었다. 차라리 골육상쟁을 벌일지언정. 너, ~니? 등 은근히 간략하고 짧은 대사들이 많은데, 작중 내내 무겁기만 한 중후반부를 조금이나마 환기시켜주는 대사로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지만 현실은 실제 궁중어투라서 쓰인 것이다. 궁중어투를 잘 살린 것으로 유명한 사극 대왕의 길의 영조도 거의 똑같은 말투를 사용한다. 실제로 영조는 신하가 아침에 문후를 여쭐 때에도 "나는 일없다" 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답했다. 한중록을 봐도 영조는 세자에게 "그 술은 누가 주더니?"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니" "어찌 그러하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배우의 출신지(경남 김해)가 출신지여서 그런지 억양상 동남 방언이 묻어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연기력과 상관없이 몰입이 깨졌다는 평도 있다.
"별일 없지?" 영조가 불길한 일이 있는 날에, 부정을 떠넘긴다는 의미로 싫어하는 사람을 불러서 말하는 대사. 처음엔 내관, 그 다음엔 세자를 불러서 이런다. 이 점은 영화와 사료가 조금 다른데,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가 부정을 씻기 위해 세자를 불러서 실제로 한 말은 "밥 먹었냐"였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해당 상황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영조가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훌륭한 배우 개그가 되어 버려 관객들이 빵 터질 것을 우려해 유사한 의미의 다른 대사로 바꾸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사도 세자 (유아인)”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 조선의 세자이자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아들. 영화 도입부에서 사도세자는 마치 분노에 미친 사람처럼 칼자루를 쥔 채 영조가 있는 곳을 쫓아간다. 물이 흐르는 진창을 따라 걸어가는데, 당시의 일을 기록한 한중록에도 "수구(水口)를 통해 윗 대궐로 가리라.", "내 기어이 '협검(狹劍: 칼을 참)하고 아무리나 하고' 말 것이다."라는 사도세자의 말이 있다. 하수도를 따라 영조가 거처하는 궁궐로 가서 (아마도 영조를) 죽이고야 말리라는 분노 어린 말. 타이틀 직후 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첫 번째 날부터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빈 이씨에게 간밤에 세자가 저지른 일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경화문을 통과해 세자를 어전으로 나오도록 시킨다. 그저 앉아만 있는 세자비 혜경궁 홍씨의 매정함에 기막혀하며 세자는 영조 앞에 나서고, 영조는 각종 냉병기와 굿하는 도구를 가져와 세자가 자신을 해하려는 저주를 내리려 한 게 아니냐고 추궁하자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자기 스스로의 굿을 지낸 것이라며 비꼬듯이 답한다. 영조는 더 들을 것도 없다며 칼을 내던지며 자결을 명령하고, 세자는 이런 법도가 대체 어디 있냐고, 차라리 의금부에 끌고 가 심문을 하라며 절규하고 반항한다.
이어 악에 받힌 세자는 칼을 들어 스스로 목을 베려 하지만, 뒤에서 난입한 신하들이 몸으로 막아내자 머리를 바닥에 찧어가며 거듭 자결을 시도한다. 이런 소동을 보다못한 영조는 아예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하고, 세자가 제발로 들어가자 직접 뚜껑에 못을 박는다. 못을 박는 영조의 현재 모습에서 세자가 막 글을 배우던 과거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회상이 시작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의 눈에 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아버지'가 아닌 '군주'로서,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영조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진 않았으나 다정한 말로 표현하는 대신 완벽을 요구하며 지나치게 공부하라고 갈궜고, 복잡한 정치상황과 왕가의 숙명에 대해 알기 쉽게 풀이해 설명해주진 않고 끊임없이 아들을 검열하며 구박만 한다. 대리청정을 맡게 된 순간부터 아버지와 관계는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면 영조가 뒤에서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하냐며 트집을 잡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면 그것 하나 제대로 못하니 대리시킨 보람이 없다며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지 않나, 능행 중에 비가 오자 영조에게 "네가 거짓말이나 하니깐 가뭄에 시달리는 남도에 내려야 할 비가 능행길에 내린다"는 말도 안되는 면박과 함께 "넌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할 자격이 없다. 돌아가라!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라는 말을 들으며 행차에서 쫓겨나 길에 쓸쓸하게 남겨진다. 대왕대비와의 언쟁으로 영조가 왕위를 선위하겠다며 별궁으로 떠나자, 선위를 거두어달라며 눈 오는 날에 끝까지 엎드려 석고대죄를 하다 쓰러지고 만다.
이후 대왕대비인 인원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온갖 기행을 일삼는다. 이때 상중에서 영조가 한 말이 가관인데 가만히 있었으면 네가 왕이 되는 건데 윤허를 거두게 해서 대비까지 돌아가시게 만들었냐며 세자를 갈군다. 이에 울화통이 터진 사도세자는 "예, 다 제 잘못입니다!"하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 뒤 국정에 전념하기 보다는 사냥이나 유희를 즐기는 쪽으로 바뀌었고, '내관의 목을 따가지고 가족들에게 내보이기', '관을 짜서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기', '상 중에 술 마시기', 생모인 영빈 이씨가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중전복을 입히고 중전의 예우로 배례와 행차를 하는 등 정순왕후를 대놓고 무시하고 아버지인 영조를 아예 늙은이라고 부르는 등 부자 관계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최악으로 치닫는다. 이에 폭발한 영조는 "네가 며칠째 대리청정도 안 들어오니, 내가 너한테 문안드리러 왔다."라면서 귀 씻은 물까지 끼얹으면서 내 탓이다. 너 같은 인간을 자식이랍시고 세자로 세운 내 잘못이야라는 폭언으로 대꾸한다. 세자는 부왕의 가혹한 압박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주변 사람들과도 점점 멀어진다. 수행원들에게 가혹하게 대하고, 공부를 아예 놓아버려서 스승들과도 서먹해지고,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세손 얘기만 꺼내 부부 관계도 어긋나버리게 된다. 심지어 아들의 가례(결혼식)에도 영조의 허락을 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부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나 좌절되고 머리 숙여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사과하기를 여러 번. 그러던 중 김상로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자신이 역모를 한다며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고하고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고 영조가 나경언의 발언을 지지하게 되자 힘겹게 버티던 세자는 무너지고 만다.
한번 더 사과하며 부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솔직히 울화가 있어 힘들다고 외쳐 보지만 부왕은 "넌 존재 자체가 역모야! 울화? 왜, 차라리 미쳐서 발광을 해라, 이 자식아!!"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금천교로 가서 석고대죄하라는 명을 내린 채 세자의 눈 앞에서 방문을 닫아 버린다. 이것도 실제로 실록에 나오는 일화다. 폭우 속에서 대죄하던 세자는 결국 울화가 폭발해 상복을 입고 측근들과 함께 부왕을 죽이러 경희궁으로 향한다. 영화는 여기에 또 다른 영화적 창작을 덧붙여 진행한다. 세자가 부왕을 상대로 역모를 감행했으나 세손을 위해 포기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와 대화하는 세손을 보고, 처음에는 세손만 편애하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원망감과 그 세손에 대한 질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문밖에서 칼을 쥐고 노려보지만, 이어지는 문답에서 세손이 광기 속에 감춰진 자신의 진심을 헤아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로써 자신이 결코 가지지 못한 군주의 자질과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갖춘 세손과, 그 세손이 왕위를 잇는 데 갈림돌이 되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세자는 결국 검을 내려놓게 된다. 하지만 끝내 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를 설득해 세손의 영위를 위해 세자를 내치기로 결심하면서 이 사건은 영조의 귀에 들어가고, 이렇게 과거 서사는 영화 초반부의 첫 번째 날로 이어진다.
다음 장면은 다시 현재,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일곱 번째 날 밤이다. 세자는 영조와 마지막으로,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대화를 신하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도록 공부와 예법에 평생 목숨을 걸었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그동안 세자를 갈구고 모질게 대한 의도가 다 제대로 된 군주로 만들기 위함이었음을 토로한다. 이에 세자는 그런 아버지의 사정을 알기에 자신도 노력했지만, 공부와 예법에만 집착한 나머지 세자라는 사람 개인을 짓밟으면서 키워온, 성인이 돼서도 후계자 노릇 하려는데 간섭하고 무시하고 구박하기만 한 아버지 밑에서 미치도록 괴로웠다고 고백한다. 영조는 삶과 죽음의 문턱까지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냐며 슬퍼하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인 세손이 살려면 임금인 자신은 자식을 죽인 아비로, 세자인 아들은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되어야만 한다고 절규한다. 그리고 세자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난다. 죽은 다음날 시신을 수습하고 염을 하는데, 뒤주에 갇힌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시신의 처참한 몰골과 그 굳어버린 다리를 관절채로 우지끈 꺾어서 펴는 장면이 압권. 영화에서 이야기 흐름 상 영조와 사도의 사이가 중심 줄거리이지만, 주제의식은 사도와 그의 아들 정조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도가 부왕인 영조를 죽이려다 포기한 것은 예법보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아들 정조 때문이었으며, 뒤주에 들어갔을 때 세손 탄생 시 자신이 그린 부채 그림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깨닫고 울부짖는다.
자신과 다르게 영조의 사랑을 받는 정조에 대한 부러움도 내비친다. 활터에서 정조에게 숙종의 능행을 따라갔던 사실을 묻거나 영조가 좋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정조의 말에 화살을 일부러 허공에 날리는 장면은 사도가 가진 정조에 대한 부러움과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 슬픔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아들이 할아버지의 기대때문에 원치도 않는 공부를 하는 자신을 비관하자 사도세자는 아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차가웠던 세자와 세손의 부자 관계는 점차 부드러워 지기 시작한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영화를 보다 보면 비참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영조의 콤플렉스로 인해서 지속적인 고통을 받은 자식의 모습으로 나온 사도세자는 영화속에서 제일 비참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계속 갈굼받다가 뒤주에서 굶으면서 아들인 세손의 울음소리에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안타까움만 자아낸다. 관객 입장에서는 사도세자의 행동을 볼 때 변덕스러운 영조에게 갈굼받으며 미쳐가는 과정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볼 수 있다. 안 미치는 게 기적일 지경이다. 더 무서운 건 이 모든 게 사료에 기록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영조가 실제 사료에 비해 미화가 많이 되었다. 영화에서 더 많은 영조의 악행을 시간상 추가하지 못했다 하여도, 끝말의 뒤주 속에 갇힌 세자와 미안한 마음의 대화는 당연히 없고, 말년의 후회나 참회의 모습 따위 보이지도 않았다. 편집된 장면들 중 부왕의 지나친 구박으로 마음이 피폐해진 세자가 인원왕후와 정성왕후를 모시는 빈소에 홀로 찾아가 "중전마마, 대비마마. 지금 이 순간이 그냥 지나가게 해 주소서."하고 힘없이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이다. 영화는 심의문제 때문인지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이 상당히 순화되어 있다.
예로 조선왕조실록에선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고 나오는데 영화에선 내시 딱 하나만 죽이며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도 않는다. 아마 저런 것들을 다뤘다면 저 심의로 나오긴 힘들 수도 있다. 사도세자가 딱 하나 죽이는 장면도 좀 아슬아슬하다. 머리를 잘라서 들고 다니긴 하는데 카메라가 미묘하게 비껴가며 촬영하고 있다. 그러나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런 순화조차도 "사도세자를 사람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세손 (이효제) / 정조 (소지섭)”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 자신의 아버지인 세자가 할아버지인 영조로부터 자결하라는 명령을 듣자,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박으며 절규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어머니 혜경궁에게 '어머니, 아버지 어떻게 해?'라며 울먹인다. 이후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못을 박자 뛰쳐나가서 글공부든 뭐든, 아버지의 몫은 자신이 대신 할테니 제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결국 영조의 명령으로 다른 신하에게 안겨 쫓겨나고 만다. 태어났을 당시에는 싫어하는 세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영조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곧 사랑과 총애를 듬뿍 받는다.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릴 때도 명을 거두어달라는 많은 신하들을 내쫓았음에도 세손을 보자마자 뒤주에 못박던 것도 멈춘 채, 세손마저 뒤주 안에 들어가게 둘 거냐며 다급한 기색을 보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영조는 세자에게는 억지를 부리면서 능행 도중에 쫓아낸 반면, 세손과는 같이 능행을 가서 옆에 두고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속마음을 털어놓기까지 한다.
이때 영조는 세손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는데, 이 장면은 손자를 대하는 여느 가정의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손의 경연에서 영조가 직접 심사하는 가운데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자 "그래, 통이야!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이런 생각이 나오기는 힘들다."라며 세손을 칭찬하며 "삼백년 종사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데 이 때의 문답과 영조의 발언은 모두 실록에 있는 내용 그대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자신이 공부에 열중하는 건 모두 할아버지가 기뻐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며 내키지 않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털어 놓기도 한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 관계와는 또 다른 부자관계를 보여주는 인물로 사실상 제3의 주인공이다. 두 관계 다 아버지의 정치적 입지, 정신적 문제가 부자관계의 악영향을 주는 공통점이 있는데, 파국을 맞이 한 전자와 달리 후자의 관계는 어느정도 공감대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사도세자가 분노하여 칼을 들고 영조에게 갔을 때 사도세자를 포기시킨 게 바로 정조. 영조와의 대담에서 영조가 사도세자가 영빈 이씨의 환갑 잔치에서 사배를 할 것을 정조가 받아 들인 점을 지적하자, 자신은 할아버지(영조)가 왕이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대접을 할 수 있다며 '예법도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아버지(사도세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등의 발언을 한다. 이때 아버지에 대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가 마당에서 마침 이 말을 듣자 분노를 풀어버린다.
이는 사도세자가 젊은 시절 끊임없이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음을 연상케 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이 자신의 심정을 이해했다는 발언을 한 순간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아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하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자기 아버지와 다를바 없다는 점을 인지했을 것이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뒤 세손빈과 함께 물그릇을 들고 와서, 세자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을 가져왔으니 나오시라고 애처롭게 외치다가, 소란을 듣고 나온 영조를 보며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 제대로 줄 수도 없냐며 서러움과 한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는다. 영조는 세손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세손에게 외가(혜경궁 홍씨의 친정)에 근신하고 있으라며 끝내 외면하고 만다. 이후 세자가 죽자 아버지의 상을 치르며 슬퍼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분량은 끝난다. 성인 정조 역으로는 소지섭이 특별출연을 했다. 카메오 수준이라고 보기엔 후반 10여분 동안 무려 4개의 씬에 나와 특별출연이라기엔 결코 비중이 적지 않다. 영조와 함께 당시 있었던 화변의 기록을 세초하는 것을 바라보며 네 아비 일을 함부로 꺼내지 말라는 당부를 받지만, 그날 있던 일이 한이 되어 잊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조가 세상을 떠난 뒤, 왕위에 오르고 결말 부분에서 어릴적 참혹한 일이 너무 많아, 어머님께 재롱 한번 피우지 못하였는데, 이참에 제대로 놀아보겠다며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 새겨진 부채로 부채춤을 추는 장면을 10여 분이나 되는 짧지 않은 시간으로 마무리한다. 이 결말 부분은 감독의 의도가 섞여 있지만 평이 제법 갈리는 편이다.
이 영화가 정조 영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조 등장 장면이 상대적으로 긴 편이기 때문에 결말이 지루하다는 평도 있다. 다만 이 영화는 영조와 사도세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정조도 엄연한 임오화변 관련인이다. 특히 본작은 영조가 세손을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사도세자를 희생시켰다는 해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관련될 수 밖에 없다. 그 해석을 따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는 장면이 영화 말미에 왕이 된 정조가 아버지 능에 참배할 때, 당시에 못 드린 물을 올리며 "제가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제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날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며 오열하는 장면. 정조가 태어난 날 꿈에 나온 용을 그린 그림으로 만든 부채는 훗날 정조가 왕이 되었을때 선물하려 했던 물건이고 극 중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사도세자의 최후까지 함께한 사도세자의 유품이다. 그래도 관객 중에선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를 취한 뒤 복받치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엔딩 장면은 그야말로 백미. 원래 영화 말미에는 정조가 영남 만인소를 올리는 선비들을 접견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상영판에서는 편집되었다. 사족이 길다고 느낄까봐 편집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준익 감독은 이 장면이 편집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처럼 본작에서 등장 장면이 적지 않았지만, 소지섭은 출연료 없이 출연했다.
“혜경궁 홍씨 (문근영)”
사도세자의 아내. 풍산 홍씨. 정조의 어머니다. 정조 역으로 소지섭이 출연했는데, 이에 대해 문근영은 반농담으로 "소지섭과 로맨스 연기를 찍고 싶었는데 어머니 역할을 맡아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문근영이 〈사도〉에 출연한 이유는 평소 존경한 연기자인 송강호와 연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역부터 시작해서 60대 노인 분장을 한 문근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장이 안 어울린다는 평가가 상당히 많다. 차라리 이 부분만 적령기 나이대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낫지 않았겠냐는 평가도 있다. 분장이 마치 90대와 같아 보이는데 피부 관리도 염색 기술도 없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다. 문근영 연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머니 역할을 연기했다. 영화 전체적으로 세자의 아내로서의 모습보다는 세손의 어머니라는 모습이 더 부각된다. 영화 시작 부분을 보면 "세자는 포기하고 세손을 살릴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만 보이니 세자도 입만 열면 세손이라고 자네 눈엔 내가 안보이냐고 하소연하거나, 며느리(세손빈)에게 "부부란, 서로의 실수를 덮어주고,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끝없이 사랑하는 것이니라."라고 얘기한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세자는 아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악처까지는 아니어도, 그다지 좋은 아내는 아니었던 것으로 표현된 셈이다. 그래도 영화 최후반부에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른뒤 함께 사도세자의 무덤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면 남편의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역사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 앞에 불려갈 때, 영조가 유달리 예뻐한 제 아들(정조)의 휘항을 쓰고 가려 하자 홍씨가 머리에 맞지도 않는다며 말리면서 세자 본인의 것으로 바꿔쓰라며 실랑이를 한 일이 있었다.
이때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한 세자의 말이, "자네는 어찌 이리도 자네 생각만 한단 말인가"였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기묘한 말이다. 세자는 영조가 귀여워한 세손의 휘항을 쓰고 나가면 영조가 세손을 생각해 자기를 살려줄 것이라 생각한 것인데 혜경궁은 그걸 모르고 말리자 죽을 사람이 자식의 물건을 쓰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냐고 말한다. 그제서야 눈채 챈 혜경궁이 휘항을 내오라고 하자 싫어하는 것 써서 뭐하냐고 거부하며 자네는 세손과 함께 살려고 그러는 것이냐는 등의 폭언까지 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 기록이 혜경궁 홍씨 본인이 쓴 책인 한중록에 나오는 부분이라 혜경궁 홍씨의 행동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죽도록 내버려두겠다는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논쟁거리이다. 정말 그런 의미면 혜경궁 홍씨 자신이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계의 평도 꽤 많기 때문이다. 즉 당시 혜경궁 홍씨는 진짜로 단순히 세자의 의도를 몰랐을 뿐이고, 이런 아내의 행동에 사도세자는 섭섭한 나머지 아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오해했다는 해석.
“영빈 (전혜진)”
선희궁. 전의 이씨. 사도세자의 생모이며, 영조의 후궁이다. 영조와 사도세자를 잇는 인물 중 하나로 사도세자의 역할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혜경궁 홍씨가 세자가 칼을 들고 영조에게 간다고 알리러 찾아왔을 때 절망한 듯 주저앉아 세자를 포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날 사건의 전말을 영조에게 알리고 '세자는 처분하시되 세손은 보존해 달라'고 하는 것으로 정조를 살리고 세자가 죽는데 일조하게 된다.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도 영빈의 고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안색이 변할 정도였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직후, 세자와 세손 둘 모두 살리기 위해 고발한 것이 최악의 상황으로 가게 된 것에 대해 충격을 받는다. 아들인 사도세자에 의해 억지로 중전 복장을 입게 되고 배례와 행차를 중전과 동일하게 하는 바람에 영조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고 이것은 영조가 스스로의 손으로 사도세자를 죽이는 원인 중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아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 본심은 자신에게 효도하고 싶어서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세자가 죽은 뒤 "살아서 뭐해. 내 무덤엔 풀도 안 날거야."라고 힘없이 말하다가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죽인 게 아니지?'라고 네 번이나 되뇌이며 통곡하고 마는데, 의도야 어떻든 결국 자기 아들을 죽게 만든 어머니의 죄책감과 슬픔을 보여준다. '내 무덤에 풀도 안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실제로도 영빈이 세자의 죽음을 듣고 한 말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실제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3년상을 끝낸 후 자식을 뒤따르듯 사망한다.
“인원왕후 (김해숙)”
대왕대비로, 숙종의 계비이다. 경주 김씨. 사도세자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인원왕후가 세자를 끼고 밥을 많이 먹인 통에 세자가 살이 쪘다고 영조가 타박했을 정도다. 세자에게는 자상한 할머니지만 화완옹주와 혜경궁을 비롯한 궁중 여인들에게 궁중 예법을 강조하는 엄격한 모습을 보인다. 작중에서 화완옹주가 세자빈인 혜경궁과 나란히 앉아있자 당장 곡좌(아랫 사람이 윗사람 앞에 앉을 때, 정면으로 앉지 않고 옆으로 조금 돌아앉아야 하는 예법)를 하라고 꾸짖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화완옹주는 영조가 세자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무릎에 앉힐 정도로 가장 아낀 자식인데다 아직 예법을 잘 모를 어린애라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음에도, 인원왕후는 따끔하게 "네 이년! 어디 옹주 따위가 빈궁과 나란히 앉는단 말이냐!"라고 꾸짖으며 엄격하게 예법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 소원이 영빈에게 무례하게 군 것을 알고 매질을 하다 영조와 큰 말싸움이 났는데, 영조가 출신 운운하며 왕 못해먹겠다며 양위하겠다고 화를 내자 빈정대는 투로 윤허한다고 대답한다. 세자를 구박하는 영조의 버릇을 고치려는 의도였지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세자가 눈을 맞으며 석고대죄를 하다 거의 얼어 죽게 되자 윤허를 거두어 달라는 중전과 영빈의 부탁을 듣고 처음에는 대비의 말은 함부로 거둘 수 없다고 하지만, 세자의 상황을 듣고는 "그럼, 내가 죽으면 되겠네"라고 말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유언으로 윤허를 거두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곡기를 끊고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모호하게 표현되는데, 스스로 윤허한 것을 모양빠지게 취소한 것에 대한 자존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윤허 사건은 실제로 있던 건 아니고 실제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중재하려 애쓰던 도중 죽었다. 인원왕후 사후 사도세자의 광증은 급격히 악화되는데, 상을 치르는 와중에도 인원왕후가 죽은 걸 세자의 탓으로 돌리고, 세자도 참다못해 온갖 기행을 벌이게 된다. 참고로 영화에선 직접 묘사되지 않지만 영조 본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영화상에서도 간접적으로 나온다. 인원왕후가 문 소원(정4품의 후궁 직책명이다.)을 매질하는 와중 영조가 들어와서 인원왕후에게 "그럼 천한 저를 임금으로 만든 분이 대비이시니"하는 부분. 연잉군 시절 생모인 숙빈 최씨가 사망한 이후 의지할 곳이 없던 영조를 지원해주고 그를 왕세제로 공식 지명해준 사람이 인원왕후이기 때문이다.
인원왕후가 사도세자를 보호하자 영조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크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는 인원왕후가 대왕대비란 것도 있지만, 영조 자신의 은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작중에서는 영조와의 나이 차이가 조금 모호하게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인원왕후와 영조는 겨우 8살 차이였다. 다만 실제 두 배우의 나이 차이는 12살이고, 영조 역의 송강호 역시 하얀 수염을 붙히고 할아버지 분장을 했기 때문에 작중 나이 차이가 그렇게까지 많이 나보이는 건 아니다. 송강호가 중년이란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사도세자와 갈등을 겪을 당시 영조의 나이는 60대 중반으로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 이미 42세였다) 조선시대엔 자연사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었다.
“화완옹주 (진지희 (아역: 신비)”
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 사도세자의 여동생. 노론 음모론을 따르는 다수의 작품에서는 노론과 연합해 동복오빠를 몰아낸 악녀로 그려졌지만, 이 작품에서는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고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음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세자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영조가 무릎에 앉히기도 한다. 이 때 눈을 사시처럼 뜨는 장난을 쳐서 사도세자가 결국 폭소를 터뜨리고, 영조가 한참 설교를 하다가 "너 왜 웃니?"라고 말하는 개그씬이 등장한다. 사도세자가 영조를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미쳐서 내관의 목을 베고 도저히 한지붕에 못 지내겠다고 당장 다른 곳으로 보내라며 칼을 들이대는 지경까지 되자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자신이 나서서 아버지를 경희궁으로 이어하게 한다. 실제 역사에서 사도세자와 이상한 말까지 나올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사도세자 사후 혜경궁보다 더 세손에게 매달리는 장면을 통해 조카를 아끼는 고모의 모습도 드러낸다. 다만 이 장면에서 화완옹주의 판단은 옳았고, 혜경궁도 이에 동의하여 세손에게 상복을 벗으라 명령한다. 이후 혜경궁 홍씨와 화완옹주의 사이가 매우 나빠진 것도, 화완옹주가 친모인 홍씨보다도 더 지나치게 정조와 가까이 지내는 모습으로 인해 섭섭함+부담을 가지고, 이것이 증오로 악화되었다는게 정설이다. 실제로도 조카와 친했지만 영조 말기 세손이 척신들을 바짝 경계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정조 즉위 후 정후겸이 사사당하면서 화완옹주도 귀양간다. 화완옹주는 1737년생으로 임오화변 당시 만 25세로 정치달과 혼인했다가 젊은 나이에 상부하고 궁에 들어왔는데 영화에선 만 16세의 진지희가 섭외되었다. 당시 17세였던 정순왕후 김씨 역에 만 25세인 서예지가 섭외된 것과 대비된다. 역사 내용 그대로를 보자면 실제로는 화완옹주 역 배우가 정순왕후 역 배우보다 더 나이가 많았어야 한다는 의미다.
“정순왕후 (서예지)”
영조의 계비. 경주 김씨. 15세의 나이로 66세였던 영조와 혼인을 치룬다. 국사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세도정치와 연관이 깊은 인물이다. 물론 정순왕후가 직접 세도정치를 일으켰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정순왕후와 세도정치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한데 해당 문서에 나와 있다. 영화에선 딱히 선역도 악역도 아닌 중립자적 인물로 나온다. 실제로도 이 시기 정순왕후의 발언권은 매우 미약했다. 정순왕후의 발언권이 커진 건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이후이다. 양부모가 모두 죽고 난 뒤라 법적 보호자가 없었기에 그 틈에 정순왕후가 발언권을 키웠다. 작중에서도 정순왕후의 방이 노론 회합소로만 사용될 뿐, 뭔가 음모를 꾸미는데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영조가 두렵다고 말한다. 이 뒤로 영조의 앞에서 자신의 총명함을 보이는 장면만 나와서 뭐가 무서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런 정석적인 답밖에 하지 못하게 하는 영조의 압박감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뒤주 사건 이전에 있었던 외척들과의 모임에서는 "문안 한 번 안 오는 세자에게 무슨 정이 있겠느냐"며 사도세자에 대한 적대적인 의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와 오빠에게 주상이 무섭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것 때문에 화완옹주가 그 여자 속이 깊은 건지 맹한건지 모르겠다며 비아냥거릴 정도. 사도세자에게 엄청난 무시를 당한다. 자기는 친어머니 문안도 제대로 안드리는 불효자식인데 그 여자 문안을 왜 가냐고 핑계를 대다 친모인 영빈 이씨가 눈물로 부탁하자 마지못해 하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영조를 만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미쳐 내관을 살해하는 난리를 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특히 세자가 영빈 이씨에게 중전 복장을 입히고 행차까지 하는 등 굉장한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있다. 실제 역사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영화만 보면 세자에게 악감정이 생기고도 남는다. 사도세자가 아무 잘못 없는 정순왕후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어머니나 다름없던 정성왕후가 사망하고 맞이한 계비여서일 가능성이 높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어머니가 정성왕후처럼 아버지에게 박대당하며 살다가 한 많은 인생을 뒤로 하고 죽었는데 아버지가 얼마 안가 한참 어린 새어머니를 맞이한다고 생각해보자. 새어머니가 딱히 잘못이 없더라도 자식 입장에서 좋게 보일 리가 없다. 특히나 사도세자에게는 정성왕후가 무척 각별한 존재였음을 생각하면 영화 속에서나 실제 역사 속에서나 정순왕후는 애초에 사도세자가 좋아하기가 힘든 존재이다.
“홍봉한 (박원상)”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부채를 매개로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해주는 사람. 실제로 세자는 장인인 홍봉한에게 의지했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가 여럿 남아 전해지고 있고, 또 개중 어떤 내용들(무기를 수집한다거나)은 화변 때 언급된 폐세자의 이유들과 관련해 볼 수 있다.
“김상로 (이대연)”
사도세자에 적대적이며 나경언을 사주해 비행을 고하게 만든 대신. 노론 음모론 같은 관점이 아니라 영조의 마음이 사도세자를 떠난 걸 알고 영조에게 폐세자 명분을 주고자 한 행동이었다. 실제 역사 속 김상로는 내심이야 어찌되었든 표면적으론 세자를 비호했고 그러다 파직당하기도 했다. 김상로가 왕과 세자 사이에서 이간질을 했다고 적은 기록이 한중록에 있고 영조도 정조에게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막상 실록의 실제 기록들과 교차검증 해보면 그런 정황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영조가 뒷날 세손에게 김상로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사실 가장 큰 책임자는 영조라서 면피성 발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김상로의 행적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이 임오화변의 결정적인 사유는 되기 힘들다는게 정설이다. 아무튼 정조 즉위 후 관직이 삭탈되는데, 이 때 김상로는 이미 죽은 뒤였다.
“채제공 (최민철)”
초반부에 사도세자를 벌하러 가는 영조 앞을 가로막으며 등장한다. 이때 "어찌 일개 후궁의 말만 듣고 나라의 근본을 흔들려 하십니까?"라고 말리는데, 실제로는 당시 도승지였던 이이장의 발언이다. 이후 세자와 가까웠던 일부 신하들이 자기 신세 걱정을 하자 "지금 당신들 가문 걱정할 때요?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라고 일갈한다. 이후 난입하여 자해를 거듭하는 사도세자를 막고 왕이라고 법전 어디에도 없는 이런 처분을 내릴 수 없다며 어떻게든 영조의 처분을 막으려 하지만 결국 끌려나가게 된다. 적극적으로 처분을 반대하는 역할. 이야기 자체가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여타 신하들처럼 큰 비중은 아니다. 채제공이 실제로는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든든한 우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비중을 좀 더 늘려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반대로 주된 서사구조와 주연들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딱히 언급 없이 지나가는 점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임오화변 당시 채제공은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있어서 사도세자를 위해 별 일을 해주지 못했다.
정조도 이를 알았는지 실제 역사에는 정약용과 더불어 정조가 가장 아낀 신하 중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를 죽을 때까지 지키며 충성하다 노환으로 죽자 정조가 절규할 정도였다. 분량상 삭제된 장면에서는 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얼마 후 영조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하들과 경전을 읽자 채제공이 이를 한탄하며 세자의 처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영조가 이 일은 궁궐 밖을 넘을 수 없는 일이며, 신하가 임금의 가족 문제에 참견하냐며 언성을 높이자 채제공도 이에 지지않고 이 일을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세초하면 다 지워질 기록일 뿐이라며 대꾸하는 영조의 말에 그렇다면 세초하라는 전하의 하교까지 다 기록할 것이고 그것만은 임금도 지울 수 없다며 세자의 처분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 말을 들은 김상로는 채제공에게 강력한 처벌을 청하지만, 영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채제공에게 "그래. 어디 한번 승정원일기에 낱낱이 기록해봐라"라는 투로 대답하는 걸로 끝낸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세손의 부탁으로 모두 세초되었지
“이천보 (조승연)”
연안 이씨. 사도세자의 스승이다. 영조로부터 '보위를 세손에게 전하고자 하니, 세자를 잘못 가르친 책임을 지고 폐세자 상소를 올리라'는 명을 받는다. 올 것이 오고 말았다며 그 직후 '세자에게 자애를 베푸시라'는 애절한 상소를 남기고 자결한다. 잘 부각되지는 않으나 극중 등장하는 조정 대신들 중 분량이 꽤 많은 편이다. 어린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첫 등장하며, 세자가 졸 때 물을 뿌리면서 '지금 잠이 오시냐'며 깨운다. 엄하게 세자를 가르치지만 영조 앞에서는 질책당하는 세자를 최대한 감싸준다. 세자의 대리청정 장면에서도 세자를 지원하며, 영조의 양위 소동 때 세자가 눈을 맞으며 대죄할 때에도 끝까지 세자 곁을 지키다 자신의 옷을 벗어서 세자에게 덮어준다.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충신. 이천보 또한 양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영조처럼 모질지 않았고 이천보가 보기에는 영조가 세자에 대한 엄한 질책과 가혹한 훈육이 도를 넘었다고 느꼈을 수 있다. 자신의 양아들인 이문원은 편한 입장이지만 사도세자는 입장이 다르다. 이천보는 아들을 키우는 아비로써 사도세자가 영조의 가혹한 훈육에 정신이 피폐해져서 광증이 생겨 안타깝게 된 것을 안쓰럽게 여기는 듯 하다. 한마디로 친자식인데 연약하여 맘에 안든다고 엄혹하게 대한 영조와 양아들이 양녕대군급 말썽을 피우는데 자상하게 대한 이천보가 대비되는 부분. 여담으로, 작중 상당히 개혁적인 대신으로 묘사된다. 세자의 첫 대리청정때, 노론 원로대신들의 군권 장악을 비판하는 발언(저들이 주상의 즉위를 도운 공로를 내세우며 군권을 독점한다)을 하는 장면이라든가, 그가 자결한 후 김상로의 "순진한 것들이 개혁이니 명분이니 하다 감당 안되니 도망치듯이 죽었다"는 발언 등으로 유추해볼수 있다. 때문에 노론 음모론을 먼저 접한 관객이라면 소론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역사상의 이천보는 노론이었다.
“이후, 민백상”
두 사람 다 이천보와 함께 세자의 스승 3인방을 구성하나 이천보보다는 비중이 낮은 편. 이천보가 자결하자 세자에게 "몇년만 참으시면 용상에 앉게 되시니, 그때까지는 제발 문안드리고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하지만 세자는 거부한다. 이후 둘 다 자결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참고로 이천보, 이후, 민백상은 영조실록에서는 단순히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종실록(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1월 19일 양력 3번째기사)에서는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일을 거론하며 이들이 신사년(1761년) 함께 자결을 했다는 암시가 나온다. 여기서 신사년은 사도세자의 관서행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영화에서는 이 기록을 토대로 세 사람이 자결했다고 표현한 듯 하다.
“정성왕후 (박명신)”
영조의 첫 번째 중전. 달성 서씨. 영조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환갑 잔치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혼자 외롭게 죽었다. 참고로 당시에는 평균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회갑은 대경사로 취급되었다. 그냥 시골 농부도 환갑을 맞으면 사또가 축하해주던 시대에, 왕비가 회갑을 맞았는데 저러는 건 상식 외의 폭거였다. 극중에서 영빈 이씨가 영조의 성격이나 버릇을 갓 시집온 혜경궁에게 알려주는 부분이 있는데, 자기는 총애받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씁쓸해한다. 하지만 영빈 이씨 본인은 그녀를 위해 환갑 잔치를 하자고 영조에게 건의해줄 만큼 존중해주는지라, 둘 사이엔 큰 다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다. 노년에 거동이 힘들 때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한 것도 다름아닌 영빈 이씨다. 실제 역사에서는 대비인 인원왕후보다 한달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속에서는 인원왕후가 시름시름 앓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며 인원왕후와 달리 승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장면이 없다. 대신 국상 중에 영조가 세자를 부르고 나서 대비와 중전이 죽었다는 언급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곡기를 끊기 전의 대왕대비는 정정한 데 반해 정성왕후는 혈색도 없고, 영빈이나 화완옹주에게 부축을 받는 묘사로 정성왕후의 건강이 나쁨이 드러나기도 했고. 사도세자가 미치고 결국 죽게 된 원인이 정성왕후의 부재도 크다는걸 감안하면 중요 인물 치고 비중이 현저히 낮다. 배역을 맡은 박명신은 영빈 역할을 맡은 전혜진이 추천해서 영화에 합류했다고 한다.
“내인 문 소원 (박소담)”
영조의 후궁. 영조는 불길한 기운이 들면 물로 귀를 씻어내는 습관이 있는데, 본래 그 물을 담은 대야를 드는 역할을 맡은 나인이었다. 그러다 영조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며, 임신까지 하면서 한 순간에 신분이 격상된다. 이후 영조의 총애를 믿고 오만해져 선희궁에게 버릇없이 굴다가, 이를 괘씸하게 여긴 대왕대비에게 종아리에 회초리 찜질을 받는 등 눈물 쏙 빠지게 혼쭐이 난다. 참고로 이 일화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다만 영화 묘사상 이 사건은 대비의 죽음으로까지 바로 이어지지만 실제 정성왕후가 환갑을 맞은 것은 인원왕후 승하 6년전이었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영조의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는데, 아들에게는 사소한 예법 가지고 깐깐하게 굴며 갈구면서 정작 대비가 예법 문제로 자신이 아끼는 후궁을 혼내자 대비에게 대든다. 게다가 대비가 문 소원을 '천한 것'으로 매도하자 이를 제멋대로 확대해석해서 자신의 출신 문제까지 들고 나온다. 영조의 일그러진 인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계비인 정순왕후가 들어온 이후로 등장이 없다. 이 내인을 정순왕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동일인물이 아니다. 정순왕후 본인은 정식 간택을 통해 중전 자리에 올랐다. 숙종이 희빈 장씨 이후 후궁이 왕후가 될 수 없도록 법을 만들었기에, 실제로 영조가 마음이 있었어도 문 소원을 왕후로 삼을 수 없었다. 실제 인물은 1776년(정조 즉위년), 오라버니인 문성국과 함께 영조를 이간질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삭탈당하고 동년 음력 8월 10일 사약을 받았다. 문성국도 이 때 역률이 적용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실록과 한중록에 문씨 남매가 이간질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영조의 며느리로서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었으며, 실록도 정조 즉위 후 정조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을 그저 기록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김상로처럼 책임전가 당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대신들은 정조가 사도세자 일을 추궁할 것을 겁내고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데다가 대신들 입장도 고려해야 했으니, 그들에게 선왕의 후궁에 불과한 그녀는 굉장히 만만한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홍 내관 (정석용)”
영조의 내관. 초반에 영조가 안부를 묻고 귀를 씻는 장면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싫어하는 듯 하다. 세자나 혜경궁 홍씨에게 영조의 소식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도 하고, 영화 후반부에 유교의 장례 법도에 따라 궁궐 지붕에 올라 영조의 승하를 고하는 초혼(招魂) 의식을 한다. 요즘은 뜸하지만, 2000년대초 TV사극만 해도 이 장례 풍습을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
“박 내관 (차순배)”
사도세자를 모시는 내관. 단역이지만 작중 사도세자 이상으로 불쌍한 사람. 세자의 인생 전체를 함께한 인물로, 세자가 영조에게 질책당하고 망가져가는 내내 옆에서 착잡한 모습으로 지켜본다. 세자가 어릴때 잘 처신해서 영조의 비위에 맞추도록 하지못하고 너무 놀아주기만한 정도의 실책이 있긴하지만, 세자가 나이가 들어 막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입장이 되지못해 주변인에게 알리는 역할만 한다. 결국 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날로 세자의 비행을 막지못한 죄로 참수된다. 세자가 아주 어릴때부터 잦았던 영조의 질책으로 좌불안석에, 양위소동, 무덤파고 놀기 그나마도 자긴 못놀고, 이후 세자가 히스테리를 넘어 광증을 일으켜 동료 내관까지 살해당하는 모습들을 보며 그가 느꼈을 고통은... 상전 하나 잘못만나 인생 전체가 꼬인 케이스.
“나경언”
나경언의 고변으로 유명한 인물. 작중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한 이유는 나경언의 동생이 사도세자에게 살해된 내관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상로가 세자를 처리하려는 영조의 뜻에 맞춰 세자의 비행을 기록한 글을 그를 통해 제출하게 했다. 일개 양민이 왕에게 뭔가를 직접 고발하기란 불가능하므로, 세자가 역모를 꾀했다는 거짓 증언으로 영조에게 글을 직접 바친다. 그의 최후는 상당히 황당한데 이 고변을 들은 영조는 대소신료들이 나경언과 같지 않다며 화를 내고 나경언을 칭찬했으나 그 즉시 나경언에게는 고언은 좋지만 역모 운운하여 왕을 놀라게 한 죄로 참수해버렸다. 채제공과 홍인한 등은 그를 문초하여 배후를 밝히자고 주장했으므로 영조와 김상로 측에서 입을 막은 것. 김상로가 그를 즉시 참하라고 주장하여 비겁하게 묘사되지만, 달리보면 애초에 역모로 거짓증언한 시점에서 죽음을 피할 순 없었기에 고문당하지 않게 빨리 끝내준 것이기도 하다. 다만 김상로가 죽을수도있다고 고한 점이나 죽이시라고 고하자 나경언이 크게 놀라서 김상로를 쳐다본 걸 보면, 나경언은 백프로 죽는 일이란 걸 모른 듯 보인다.
줄거리
비가 거칠게 내리던 깊은 밤, 궁궐 후원의 무덤에서 나온 세자는 검을 들고 수구(하수도)를 통해 경희궁으로 향한다. 이에 세자빈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에게 급히 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나 그 사이 세자는 영조의 거처에 도착해 창호를 사이에 두고 영조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영화가 시작된다.
첫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4일. 의복을 갖춰입는 영조에게 영빈은 세자의 죄를 고하며 세자를 대처분할 것을 요청한다. 채제공의 반대에도 영조는 강건한 입장을 내보이며 가마를 타고 경화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들어오며 세자를 호출한다. 혜경궁 홍씨는 내시에게 영조가 어떤 문을 통과했는지 묻고, 경화문이라는 답변에 세자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한 듯 총애하는 세손이라도 데려갈까 고민한다. 그러나 묵묵부답인 세자빈. 이런 세자빈의 모습에 세자는 섭섭해한다. 창덕궁 인정전 앞 계단 위 영조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있는 세자. 영조는 세자에게 용포를 벗으라 명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궁궐 문을 닫는 한편,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세손은 문틈 사이를 통해 아버지를 지켜본다. 세자가 용포를 벗자 속에는 상복을 입고 있었고, 그런 세자를 보며 영조는 자신을 죽이려 하기에 미리 상복까지 입었냐고 나무란다. 이에 세자는 대비마마와 중전마마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쭉 상복을 입어왔다고 답한다. 그러나 분노한 영조는 3년상은 진작 끝났다면서 세자가 후원에 만든 무덤에서 가져온 관짝과 무기들을 언급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저주한 것이 아니냐 캐묻자, 세자는 부왕이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하기에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판 것이라 답한다. 차마 어제 있었던 참담한 사실까지 언급하지 못한 영조는 세자 앞에 검을 던지며 지금 자결하면 세자의 칭호는 지킬 수 있다며 세자가 자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세자는 조선의 국법에 자결이라는 형벌도 있냐며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차라리 의금부로 넘기라 한다. 그러자 영조가 이것은 나랏일이 아닌 집안일이고 자신은 지금 아비를 죽이려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라 답하자 세자는 자신을 세자는 커녕 자식취급이라도 한 적이 있냐며 분노한다. 이러한 상황에 세자를 모시던 일부 신하들이 자신과 가문이 해를 입을까 걱정하자, 채제공은 자기보존에만 신경쓰는 신하들을 꾸짖는 가운데 세자는 검으로 자결하려 한다. 이에 신하들이 닫힌 문을 박차고 난입하여 자결을 시도하는 세자를 만류하고 영조에게 자비를 요청한다. 그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검을 뺏긴 세자는 스스로 돌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계속해서 자결을 시도하였고 채제공은 영조에게 아무리 국왕이라도 대명률에도, 경국대전에도 없는 이러한 처분은 내릴 수 없다며 세자의 이마를 감싼다. 그러나 강고한 영조는 연연하지 않고 신하들을 모두 끌어내라 소리친 뒤, 바닥에 놓여있는 관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뒤주를 가져오라 명한다. 그렇게 세자 앞에 뒤주가 놓이자 세자에게 뒤주에 들어가라 명하고, 세자는 묵묵히 들어간다. 그러자 뒤주의 뚜껑은 닫히고 그것에 영조가 직접 못질을 한다. 이를 보고있던 세손이 뒤늦게 난입하여 통곡하며 아버지를 용서해달라 간청하나, 영조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는데 왜 세손이 들어오게 하냐며 어서 끌어내라고 한다. 그러자 다급하게 홍인한이 세손을 데리고 나간다.
25년 전
1737년, 세자의 나이 3살. 세자시강원에서 붓글씨로 '사치'라는 글을 쓴 세자에게 영조는 무엇이 사치이고 아닌지를 묻는다. 그러자 세자는 용포를 가리키며 비단은 사치이고 속의 무명 저고리를 가리키며 무명은 사치가 아니라 답하자 영조와 신하들은 이런 세자의 총명에 흡족해하였다. 이후 영빈과 중전, 대비마마가 있는 자리에서도 효를 보인다. 날이 깊어지자 잠에 들려는 세자는 영빈을 찾았고, 영빈은 오늘만이라도 자신이 재우면 안되겠느냐 하며 상궁에게 청하지만 상궁은 그것은 왕가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며 세자는 더이상 영빈이 아닌 중전의 자식이라며 반대한다. 한편 영조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 지났다는 내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세자를 위해 밤을 새며 책을 쓰는 등 세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둘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5일. 영조는 세자를 모시던 내관들과 무당, 여승, 기생 등을 붙잡아 들인 뒤 채제공을 비롯한 도승지에게 세자를 평민으로 강등하라는 교지를 쓰라 명하나 도승지들이 쓸 수 없다며 거부하자 이에 영조는 자신이 직접 교지를 작성한다. 김귀주는 차라리 세자에게 사약을 내리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밝힌다. 이에 김상로와 김한구는 만약 세자에게 사약을 내린다면 조선의 국법에 의해 세자는 공식적인 역적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연좌제로 인해 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도 역적이 되는 것이라며 사약을 내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후 세자를 모시던 사람들이 참수당하는 가운데 김상로가 영조의 교지를 읽자, 듣고있던 세자는 자신에 대한 대처분을 자신의 생모 영빈 이씨가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되며 절망한다. 18년 전 1744년, 세자의 나이 10살. 세자가 혜경궁 홍씨와 혼례를 올리자 영조는 왕실에서 조심해야할 것들을 당부하지만 세자는 바로 앞에 있던 여동생 화완옹주의 짖궂은 장난에 그만 웃음보를 터트린다. 영빈 이씨를 비롯한 왕실의 어르신들은 혜경궁 홍씨에게 영조에게 각별히 유념해야 할 사항을 알려주었고, 이후 세자의 가례선물로 청나라 황제가 보낸 강아지가 오게 된다. 세자가 강아지를 안고 있는 혜경궁의 모습을 그리고 있던 와중, 때마침 방문한 영조는 그림이나 그리며 공부를 게을리 하는 세자의 모습에 섭섭한 감정을 보이게 된다. 이후 세자시강원에서 경전을 잘 암기하지 못하고 나아가 공부 자체에 별다른 의욕을 가지지 않는 세자의 모습에 영조는 세자를 엄히 꾸중한다.
셋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6일. 깊은 밤, 정신이 쇠약해진 세자는 뒤주 안으로 수많은 지네들이 들어오는 환상을 보게되고 이에 견디다 못한 세자가 뒤주의 벽을 부수고 빠져나와 궁궐 후원으로 전력질주한다. 세자는 후원의 연못에 몸을 던지고 그 속에서 몸부림을 치며 이럴거면 차라리 사약을 내려 빨리 나를 죽이고 그 늙은이가 천년만년 임금 해먹으라고 소리치며 광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조가 세자를 다시 뒤주에 가두라 명한다. 이에 세자는 비통해하며 영조에게 그동안 당신이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해 보고 그래도 당신이 그렇게 떳떳하다면 차라리 지금 나를 죽이라고 소리치치만, 영조는 세자에게 너는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차갑게 말한다. 그렇게 영조는 세자를 다시 뒤주에 가두었고, 홍봉한은 그 찰나의 순간 뒤주 안으로 세자가 아들을 낳을 때 그린 그림으로 만든 청룡부채를 넣어준다. 한편 영조는 세자가 다시는 뒤주를 부수고 나오지 못하도록 뒤주를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고 그 위를 풀더미로 덮어버리라 명한다 13년 전 1749년, 세자의 나이 15살. 세자와 함께 종묘를 걷던 영조는 이후 세자에게 자신의 보위를 전위할 뜻을 내비친다. 그러나 세자와 신하들 모두 반대의 입장을 내놓자, 영조는 한발짝 물러나 세자가 대리청정하는 것으로 타협한다. 이후 세자시강원의 이천보 등은 세종 시기 대리청정을 한 문종의 예를 들며 세자에게 조언을 해주었고, 세자는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균역법 시행을 놓고 김상로가 반대의 뜻을 내비쳤지만 세자는 당당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 소식을 들은 인원왕후를 비롯한 왕실 일원들도 세자의 단결력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영조는 세자가 자신이 쌓아왔던 조정의 탕평을 무너뜨렸다며 세자를 질책한다. 그런 영조는 세자를 못마땅해하며 세자의 정책을 매사 뒤집어버리고, 대리청정의 범위를 벗어난 중요한 건은 자신에게 아뢴 뒤 자신의 의견에 따라 처리하라 명한다. 이러한 영조의 행보에 세자는 결국 안건을 무엇 하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결정하지 못하고 영조의 눈치만을 살피며 매번 영조의 의견을 물어보게 된다. 그러나 영조는 이런 세자를 보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것 없이 매번 나를 번거롭게 한다며 또 질책하자, 세자는 장인인 홍봉한에게 울분을 터뜨린다. 이후로도 영조의 세자를 향한 어처구니 없는 질타는 계속된다. 영조가 나주 괘서 사건의 주동자들을 친국하면서 세자가 친국장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질책하고, 세자가 신하에게 시를 써준 것을 질책하고, 나아가 거룩한 숙종의 능행길에 비가 내리자 그것 역시 세자 때문이라 세자는 숙종을 참배할 자격이 없다고 질책하며 세자만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다.
넷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7일. 매미가 울어대는 한 여름속 더운 날씨. 뒤주 속에서 여태 물 한방울 마시지 못한 세자는 극심한 갈증을 호소하며 물을 가져오라며 고함을 지른다. 그러자 뒤주를 지키던 병사들은 뒤주에 물을 끼얹었고 세자는 천장 틈새로 새어 떨어지는 물을 마시지만 턱없이 모자르다. 조금 뒤 아직 갈증이 해소되지 않은 세자는 소변이 나오자 그것을 청룡부채로 받아 마신다. 그러다 문득 부채에 있던, 자신이 아들을 위해 그린 청룡을 발견하고는 그 그림을 보며 대성통곡한다. 10년 전 1752년, 세자의 나이 18살. 세자는 태몽에 나온 청룡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세자빈이 아이를 낳고 있는 곳으로 급히 가져오고, 아이가 아들일 것이라 장담한다. 그 뒤 세자빈은 정말로 아들을 출산하게 되고, 인원왕후를 비롯한 가족들은 기뻐한다. 그 과정에서 옆에 있던 신하가 세자에게 청룡 그림을 달라고 청하며 이것을 부채로 만들고 장차 세손이 성장하여 왕이 된다면 그에게 바칠 것을 약조한다. 100일 뒤, 세자는 100일을 맞은 세손과 함께 세자빈 혜경궁 홍씨, 어머니 영빈 이씨와 함께 영조에게 설레는 마음으로 문안인사를 가게 된다. 그러나 영조는 아이를 다시 데려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중전의 환갑이 코앞인데 아직 주상의 말씀이 없어 난감하니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질문하고,옆에 있던 소원 문씨가 영빈 이씨에게 일개 후궁이 그까짓 일로 주상을 번거롭게 해서야 되겠냐는 무례한 발언을 한다. 이에 분노한 인원왕후는 내명부의 법도를 바로세우기 위해 문씨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친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급히 대비전으로 온 영조는 인원왕후에게 자신의 후궁 소원 문씨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따진다. 이에 분노한 인원왕후는 영조에게 저 천한 것 뱃속에 주상의 씨앗이 들어 지금 나에게 역성을 드는 것이냐 되묻고, 자신도 천한 무수리의 자식이였던 영조는 자신의 출생 콤플렉스에 과민반응 하게 되어 그만 자신의 후궁이 천하다면 나 또한 천한 임금이니 세자에게 보위를 넘기고 자신이 임금에서 물러날 것을 윤허하라 소리친다. 이런 영조의 태도에 기가 막힌 인원왕후 역시 분노하여 이를 윤허하게 된다. 눈이 내리던 인정전 앞에서 세자와 신하들은 윤허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나, 영조는 이를 거부하며 궁 밖 별궁으로 나간다. 이에 세자가 추운 밤에 눈을 맞으면서까지 윤허를 거두어 줄 것을 기다리니, 세자시강원 스승들과 영빈 이씨가 이제 그만 들어가라 만류하지만 세자는 요지부동이다. 결국 정성왕후와 영빈 이씨, 혜경궁 홍씨는 인원왕후에게 윤허를 거두어달라 청하나, 인원왕후 역시 이참에 영조의 저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며 요지부동인 상황. 그러다 결국 인원왕후는 영조와 자신간의 기싸움에서 고통받는 건 세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윤허를 거두는 동시에 훙서하게 된다. 그렇게 훙서한 인원왕후의 장례를 치르는 가운데 영조는 세자나 죽일 것이지 왜 대비를 저승으로 끌고갔나며 한탄하자 세자는 그런 부왕의 행보에 다 자신의 탓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렇게 궁궐 밖 사당에 인원왕후의 초상화를 두고 만조상해원경을 부르며 인원왕후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술을 마시며 기생을 부르고, 궁궐 후원에 무덤을 파게 한다.
그 뒤 공부와 대리청정도 제대로 하지 않으며 방황하고 영조에게 대들기까지 하는 세자의 행보에 영조는 분노하고, 세자는 중전과 대비의 상을 핑계로 대며 변명한다. 그러자 영조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귀를 씻은 뒤 분을 참지 못하고 아예 세자에게 물을 끼얹어버리며 사도세자를 세자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는 폭언을 하게 된다.
다섯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8일. 세자를 풀어주지 않는 영조의 행보에 혜경궁 홍씨는 영빈 이씨, 홍봉한, 홍인한 등과 함께 세손을 보호할 방도를 찾으려고 하나 별다른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는 한편 홍인한은 제 살길을 찾아 새 중전인 정순왕후와 노론들을 찾아가 대책을 내놓지만, 정순왕후는 간택 시절 총명한 모습을 보였으나 현재는 영조를 두려워하는 모습만을 보인다. 5년 전 정순왕후에게 문안인사도 드리지 않는 세자의 태도에 영조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나무라자 영빈 이씨와 혜경궁 홍씨는 후원에 있는 무덤에서 굿을 하고 있는 세자를 찾아 어서 새 중전에게 문안을 드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결국 영빈의 청을 이기지 못한 세자는 문안인사를 하겠다고 약조한다. 그러나 문안인사를 드리기로 한 날, 의대증이 생긴 세자는 옷 한벌 조차 제대로 입지 못하였고 끝내 옆에서 옷을 입혀주던 애꿎은 내시의 목을 베어 살해한다. 그 뒤 그의 목을 들고 일가족 앞에 나타나 그 늙은이랑 도저히 같은 궁궐에서 살 수가 없다며 당장 영조를 경희궁으로 옮기라고 검을 들이밀며 일가족을 협박하자, 다들 겁을 먹고 기겁한 상황 속에 여동생인 화완옹주가 자신이 무조건 옮기게 하겠노라 답하게 된다.
여섯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9일. 사도세자가 살아있는지 군관들이 뒤주를 흔든 후 세자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자 세손은 세손빈과 함께 물을 떠다드리려 한다. 그러자 내금위장 김도수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영조의 명에 따라 그들을 가로막는데, 세손은 김도수의 이름을 기억하겠다 협박하며 비키라 명하고 뒤주로 다가간다. 그러나 아직 어린 세손에게 굳게 닫혀진 뒤주를 열 방법은 없었고, 세손은 슬퍼하며 며느리(세손빈)가 물을 가져왔다고 뒤주 속의 세자에게 소리치고만 있는다. 그러자 영조가 나와 이게 무슨 소란이냐며 어서 세손을 끌어낼 것을 명하고, 이에 세손은 영조에게 자식이 아비에게 물 한잔 드릴 수 없냐며 통곡한다. 1년전 1761년, 세자의 나이 29살, 세손의 나이 9살. 영조가 보는 주강에서 세손은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보이자 영조는 300년 종사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있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며 세자는 데려가지 않았던 숙종의 능행길에 세손을 동참시키는 등 총애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자신이 받지 못한 총애를 받는 세손의 모습에 세자는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깊은 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물려줄 뜻을 내세우며 세자시강원인 이천보, 이후, 민백상에게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리라고 요구한다. 따를 수 없다는 이들에게 영조는 세자가 저리 된 것은 잘못 가르친 세자시강원의 스승들 때문이고 더군다나 이는 어명이니 상소를 올리라고 요구하였으나 이천보는 영조에게 세자를 감싸는 상소를 올린 뒤 자결하였고, 이를 보던 세자를 모시는 다른 신하들이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 깨닫는다. 이에 민백상은 세자에게 잠시동안이라도 조용히 공부만 하며 지내시라 충언하지만 세자는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한다. 영빈 이씨의 환갑을 맞아 세자는 혜경궁 홍씨와 화완옹주, 세손 부부를 데리고 절을 올리는데, 이때 영빈에게 중전의 대례복을 입히고 중전에게만 올리는 사배를 올리려 하자 혜경궁이 불가하다며 머뭇거리지만 세자는 오늘만큼은 영빈 이씨가 중전이며 세손에게 절을 올리라고 호통치자 가족들은 이를 그대로 따르는 한편 옆에서는 풍악이 울리며 자신의 어머니를 환갑을 성대히 축하한다.
나경언의 고변, 그리고 세자 1762년 5월, 세자의 나이 30살, 세손의 나이 10살. 이후, 민백상이 자결한 후 폐세자를 고민하는 영조의 고민을 풀기 위해 김상로는 나경언을 사주해 세자의 비행을 고하게 한다. 그렇게 나경언이 고변서와 함께 세자의 역모를 주장하자, 세자를 옹호하는 채제공 등은 세자의 무죄와 더불어 나경언의 배후를 조사할 것을 주장하며 세자 역시 나경언과 대질시켜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조는 이러한 신하들와 세자의 요구를 묵살하고 고변서를 불태워버린 뒤 세자의 비행을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질책한 후 나경언을 참수하란 명을 내린다. 자신의 비행을 영조가 알게 되자, 그것들은 모두 울화 때문이라며 변명하고 제자식을 역적으로 만드는 영조의 행보에 울분을 토하는 세자.
그러나 영조는 그런 세자에게 또 다시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라며 폭언을 한 뒤 금천교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렇게 비가 퍼붓는 야밤까지 세자는 영조의 명에 따라 금천교에서 무릎을 꿇고 목이 찢어질 듯 통곡하며 대기하였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끝내 영조는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결국 그동안 억눌러왔던 모든 울화가 한번에 폭발해버린 세자는 혜경궁 홍씨의 극구 만류를 뿌리치며 검을 찬 채 자객들을 이끌고 영조를 죽이러 경희궁으로 가게 된다. 그렇게 영조가 있는 전각 앞까지 도착한 세자. 그 전각에서는 영조와 세손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세자는 잠시 멈추어 거친 빗소리를 뚫고 들리는 그들의 대화 소리를 엿들어 보았고, 영조는 세손이 어찌하여 영빈에게 사배를 올린 것인지 묻고 있었다. 그러자 세손이 자신은 할아버지가 임금이 아니라고 한들 임금 이상의 대접을 할 수 있다며, 원래가 사람이 있기에 예법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날 자신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리했다 답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어릴 적 모습과 같이 영조와 공감대를 맞추며 총명한 모습을 보이는 세손을 본 세자. 그런 세자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이대로 영조의 목을 내려친다면 자신마저 저런 총명한 아들을 역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다시말해 본인 또한 세손의 입장에서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영조의 모습과 같은, 원망스러운 아버지로 생각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세자는 역모를 포기하고 날이 선 검을 내리며 눈물 흘린다.
일곱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10일.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 될 운명의 날. 영조와 사도세자는 마침내 처음으로 서로간의 진실된 이야기를 나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뒤주를 연 영조는 아들의 사망을 확인한 뒤 오열하고, 영빈 이씨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며 오열하며 혜경궁 홍씨 역시 눈물을 흘린다. 허나 대외적으로는 역적을 처단한 것이기에 영조는 경희궁으로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울리라고 지시한다. 신하들은 자식 죽여놓고 개선가를 울리는 독한 영조의 행보에 기막혀하는 한편 세자의 장인 홍봉한은 구겨진 청룡부채를 씁쓸히 바라본다.
영조 : 너의 형 효장세자가 죽고, 내 나이 마흔이 넘어 네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으면 핏덩이인 널 세자로 책봉하고 두 살때부터 제왕의 교육을 시켰겠느냐? 그때 네가 보여준 총명과 슬기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랬던 네가 칼장난하고, 개 그림이나 그리며 공부를 게을리할 때,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사도세자 : 그래서 신하들 앞에 허수아비처럼 앉혀놓고, 병신 만들었소?
영조 : 너 제대로 된 임금 만들려고 그런 것 아니더냐. 네가 실수할 때마다, 내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아니?
사도세자 : 그게 어찌 내 실수 때문이겠소? 아버지가 왕이 된 과정에서 신하들에게 약점을 잡혀 전전긍긍한 것이지.
영조 : 너는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운명을 모르느냐? 저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왕이 되지 못했다면 나는 그때 죽었다. 내가 죽었으면 너도 없는 거야.
사도세자 : 그것을 알기에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소. 하지만, 당신이 강요한 방식은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소. (울먹이며) 공부가 그리 중한 것이오? 옷차림이 그리 중한 것이오?
영조 : 임금이 공부 모자라고, 대님 하나만 삐딱해도 멸시하는 것이 신하다. 이 나라는 공부가 국시고, 예법이 국시야.
사도세자 : 내가 왜 그날 밤 당신을 죽이지 않고 그냥 돌아왔는지 아시오? 사람이 있고 공부와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공부와 예법이 사람을 옥죄는 국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임금도 싫고, 권력도 싫소.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영조 : 어찌하여 너와 나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 와서야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단 말이냐? 나는 자식을 죽인 아비로 기록될 것이다. 너는 임금을 죽이려 한 역적이 아니라, (감정이 북받치며) 미쳐서 아비를 죽이려 한 광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야 네 아들이 산다.
영조 : 내가 임금이 아니고 네가 임금의 아들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여덟째 날
1762년 임오년 7월 11일. 세자의 장례가 진행되면서 영조는 세자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준다. 장례 도중 화완옹주는 세손을 끌어내며 상복을 벗기려고 하였고 이를 만류하려는 혜경궁에게 더이상 세손이 호적상으로 세자의 아들이 아니라는 비통한 현실을 알려준다. 아버지의 장례식조차 참가할 수 없다는 사실에 통곡하는 세손에게 혜경궁은 보위를 이어받아야 아버지의 한을 풀어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세손을 진정시킨다. 이후 세손의 청으로 임오화변의 승정원일기는 세초되나 영조는 그 일은 순전히 대의에 의한 것이며 추후에도 절대 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게 된다. 14년 뒤 임오화변이 발생한 지 어느덧 14년.영조가 승하한 1776년 마침내 정조는 보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하며 미처 그때 드리지 못했던 물 한잔을 드리고 오열한다. 혜경궁 홍씨 역시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생일 날 아버지가 그린 청룡부채를 들고 사도세자를 추모한다.
국내반응
네이버, 다음 둘 다 약 8점대의 평점으로 전반적으로 호평이 많다. 출연 배우에 대해서도 송강호, 유아인 등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아역까지 호연이라는 평이 많다. 영화 내용에 대해서도 눈물을 흘리며 봤다는 등의 여운을 느낀 감상평이 많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방식 때문에 그 시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정신이 없다는 평이 있다. 첨언하면 이런 식의 연출 방식은 연출가들이 애호하는 기법으로 예수의 수난을 그린 멜 깁슨이 연출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사용된 기법이다. 처절한 현재 상황과 좋았던 과거 상황을 비교 연출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처절한 현 상황을 더욱 처절하게 느껴지게 하는 효과를 준다. 또 영화의 군더더기 장면이나 특히 소지섭이 특별출연한 성년 정조의 부채춤 같은 장면이 생각보다 길고 지루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그 부분 역시 심혈을 기울여 상징성을 살린 장면인데 관객 반응이 좀 섭섭한 모양. 하지만 극의 골자와 방향을 제시한 정병설 교수부터가 이 부분을 '이상한 군더더기'라 표현한 것으로 보면 딱히 이준익 감독의 뚜렷하지 못한 의도만을 옹호해주기도 어렵다. 과욕이었던 듯하다. 장면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에필로그가 너무 길다. 사도세자의 장례식 이후 슬퍼하는 영빈, 그의 기록을 영조가 지워주는 장면, 아들 정조와 수십년만에 마침내 그의 무덤에 갈 수 있게된 혜경궁 홍씨가 무덤에서 슬퍼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사실 이 정도도 에필로그치고 충분한 분량이지만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부채춤까지 보여준 거라 정신적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 장면은 앞서 사도세자가 천대받는 후궁인 어머니를 중전 대접해주는 장면과 대구를 이루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에필로그 자체가 너무 길기 때문에 처음엔 눈물을 흘리다가도 그게 너무 길어지니 눈물은 다 마른 지 오래고 감동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문제의 여지가 있다. 역덕후들은 정말 오랜만에 이덕일식 노론 음모론이 배제된 수작이 나왔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씨네21에선 대체로 무난하거나 수작이라는 평이다. 시네21 일간스포츠 기사 역시 무난하거나 수작이라는 평. 다만 결말이 상대적으로 약해 아쉽다는 평도 있다. 김봉석 영화 평론가 "가장 익숙한 소재다. 연령층으로 봤을 때 40~50대도 유입할 수 있는 영화다. 누구에게나 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이 다뤘던 이야기다. 관객이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강점이 될 수도 있지만,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송효정 영화 평론가 "웰메이드 사극이다. 무거운 주제를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력으로 잘 풀어냈다. 다양한 세대가 어울려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높은 만족감에 비해 결말이 약하다."
박혜은 <맥스무비> 편집장은 10점 만점을 주며 극찬하기도 했다.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니 무엇을 새롭게 보여주겠는가? 이준익 감독은 이 질문 자체를 부질없게 만든다. 사도는 모든 것이 새롭다. 하나뿐인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왕의 잔혹사, 즉 박제된 이미지와 이야기에 함몰됐던 시선을 인간에게 돌리자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시간을 초월해, 온 세상의 부모와 자식이 보인다. 영조와 사도의 마지막 대화, 정조의 춤사위가 내 것인 듯하여 오장육부로 울었다. 송강호, 유아인은 물론이려니와 이름을 하나씩 거론할 것 없이 모든 배우가 무시무시하다. 이토록 인간을 알알이 헤아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떳떳한 이준익의 걸작이다."
박평식은 이렇게 평가하며 6점을 줬다.
"성정보다 행위, 비통할 따름"
개봉 전 반응
영조 역할의 송강호가 관상에서 처음으로 사극에 출연한 후 왕 역할은 처음이라 송강호표 왕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와중에, 아무리 연기파 배우라도 어색함이 있지 않을까 하는 등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송강호의 출연작 중 〈변호인〉, 〈효자동 이발사〉 등이 있었지만 일반 형사(살인의 추억), 공원 매점 주인(괴물) 등 서민적인 역할을 맡은 경우가 많았고 관객들에게도 이런 서민적인 이미지가 친숙해져 있었기 때문. 그러나 예고편과 스틸컷이 나오면서 그런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 영화 〈베테랑〉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유아인은 〈베테랑〉의 천만 돌파로 영화배우 커리어의 전성기를 맞게 된 상태에서 사도세자 역을 맡아 기대가 큰 상황. 적어도 주역 연기자의 연기력에는 걱정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베테랑〉에서 재벌 3세 마약중독자 싸이코 역으로 나오던 유아인이 이 영화에서도 정신병자 역으로 나오는 것이 묘하게 배역이 매치가 된다는 시각도 있었다. 〈서부전선〉과 추석 극장가를 노렸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전체적인 이야기가 부자지간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추석즈음 개봉이 시의 적절했던 셈.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두 부자가 갈라졌다는 속설 대신 지나친 기대감 때문에 사도세자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영조의 모습, 부자의 성격 차이와 그로 인한 부자간의 갈등을 주로 묘사할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편집증 수준으로 정신적 폭행을 가하고 이로 인해 사도 세자가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사도세자와 영조가 서로에게 반감을 가지고 이것이 극도로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결국 임오화변이 일어났다는 것은 현대에 남아있는 사료에 근거한 정설이다. 주류사학계에선 여기에 해석을 더하여 정치적 문제와 부자 갈등을 섞는 게 보통이다. 물론 이 정치 갈등도 이덕일 같은 노론 음모론은 절대 아니다.(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문서 참고.)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다는 예고편의 사도세자의 대사가 이것을 잘 나타내는 듯하다.
지금까지 영화<사도> 리뷰 였습니다.^^
영화 내용이 무척 흥미롭고 슬픔과 아픔, 감동까지 몇번을 봐도 지루하지 않은 영화인듯 합니다.
여러분들도 꼭 보시길 바라며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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